“韓日의 경계서 눈물 삼킨 마지막 황태자비의 넋 달랬으면”
‘이방자 여사의 삶’ 27일 도쿄무대 올리는 在日오페라 가수 전월선씨
재일 한국인 소프라노 전월선 씨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의 결혼식 의상 복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1897∼1970)의 비(妃)인 이방자 여사(1901∼1989)의 일대기를 그린 오페라 ‘더 라스트 퀸’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인 올해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져 27일 도쿄 신국립극장에서 선보인다.
무쓰히토(睦仁·연호는 메이지·明治) 일왕 조카의 장녀로 일본 왕족인 이 여사는 한때 히로히토(裕仁) 왕세자의 비(妃)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나 1920년 일본에 볼모로 와 있던 영친왕과 정략 결혼했다.
일본 육사 출신인 남편 영친왕은 일본 제1항공군 사령관으로 복무하다가 패전을 맞으면서 연합군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어렵게 살았다. 영친왕과 이 여사는 한국 국적이 회복된 이듬해인 1963년 한국 땅을 밟았다. 이후 영친왕은 오랜 투병 생활 끝에 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고 이 여사는 홀로 한국에 남아 장애인 봉사활동에 헌신하다 1989년 남편 곁으로 떠났다.
이 여사의 기구한 삶을 오페라로 되살린 주인공은 남북한과 일본 3개국 정상 앞에서 노래한 것으로 유명한 재일 한국인 오페라 가수 전월선 씨. 자신이 직접 관련 자료들을 조사하고 관계자들을 인터뷰해 대본을 썼다. 주연도 맡았다.
이방자 여사
전 씨는 7일 도쿄 기타신주쿠에 있는 자신의 음악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일본인이지만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가 됐던 이 여사의 삶은 재일 코리안의 삶을 거꾸로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1시간 40분 분량의 이 오페라는 소녀 이방자가 1919년 신문에서 자신의 약혼 소식을 보고 충격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920년 영친왕과 결혼한 후 이듬해 낳은 장남 진을 1922년 한국 방문 중 잃고 고통 받는 장면은 극중 하이라이트다. 전 씨는 “이 여사는 마지막까지 장남이 독살됐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조선 황실의 혈통을 끊기 위한 일제의 모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여사는 1989년 만 88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편 영친왕은 기록조차 거의 남기지 않았다. 전 씨는 “생전에 두 분이 마음 깊은 곳에 꼭꼭 가둬 뒀던 감정을 노래를 통해 풀어내려 했다. 적어도 오페라에서 두 분의 감정은 자유로워졌다. 넋이라도 달래질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페라 초연에 대한 일본 각계의 관심은 뜨겁다. 주요 신문의 보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 여사의 일족인 일본 왕족들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전 씨는 전했다. 전 씨는 “‘이 여사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며 놀라는 일본 젊은 세대의 반응에 희망을 느끼고 있다”며 “일본 젊은 세대가 이 여사를 통해 멸망한 조선왕조와 한일 근현대사에도 눈을 뜬다면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우호가 깊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씨는 특히 ‘2개의 조국’이라는 오페라 마지막 아리아를 부를 때마다 가슴이 복받쳐 올라온다고 말했다. 남과 북, 한국과 일본이 교차하는 재일 코리안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일 것이다.
이 여사가 영친왕의 곁을 끝까지 지킨 것은 일왕의 칙령 때문은 아니었을지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 씨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그랬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 여사는 가장 어려운 시절에도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가 별세한 이후에도 약속대로 한국에 남았습니다. 진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죠. 정략 결혼에 희생되긴 했지만 두 분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마음의 기적’이 일어났던 겁니다.”
전 씨는 “재일 코리안으로서 한일 간에도, 남북 간에도 ‘마음의 기적’이 일어나길 고대하고 있다”며 먼 곳을 바라봤다.
http://news.donga.com/Main/3/all/20150911/73560635/1
|